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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이야기

종묘

by 한 뫼 2017. 8. 15.


종묘(조선 왕실의 사당 )


외대문(정문)

종묘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정문답게 정면 세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되었고, 정문 좌우로는 종묘외곽을 두르는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정문 안 서쪽으로는 본래 종묘를 지키는 수복방이 있었다.


정문은 원래 전면 중앙에 난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도로를 조성하면서 도로 면이 높아지게 되어 땅에 묻히고 지금은 단벌의 장대석 기단만 있다.


종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삼문(外三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검박하고 단순하다.

정문밖에는 하마비(下馬碑)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된 어정(御井)이 있다.





종묘 안내도





1. 향대청(香大廳) 일원

종묘제례를 위한 준비실 향대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ㆍ축문ㆍ폐백과 같은 제사 예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 잡고 있어 두 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졌다.

향대청 동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고, 그 뒤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툇마루 앞에는 신발벗는 섬돌을 길게 설치해 여러 사람이 드나들기 편하게 했다





신로(神路) (아래사진의 가운데 돌로조성된길)    

신로는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낸것으로 신(神)만이 다니는 길을 말한다.

종묘에는 신로 외에도 신향로(神香路), 향로(香路), 어로(御路), 세자로(世子路) 등이 있다.

종묘 외대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세가닥 길로 깔려 있다.

가운데 길이 약간 높고 양옆은 약간 낮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와 향ㆍ축문ㆍ폐백 등 제사 예물이 오가는 향로(香路)가 합쳐진 신향로이고,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왼쪽 길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다.

신향로는 종묘 정전과 영녕전 남쪽에 난 대문에 이르러 묘정 상월대 아래에 닿기 때문에 이 남문을 신문(神門)이라 한다.

어로와 세자로는 재궁에 이르러 재궁 서문에서 정전 동문, 영녕전 동문으로 이어진다.




지당(池塘)    

종묘에는 물이 담긴 연못(지당)이 세곳 있다.

사각형의 지당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고 땅은 네모짐) 사상을 나타낸다.

대부분의 궁궐 지당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 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다.




망묘루(望廟樓)    

망묘루는 종묘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도서를 보관하고 그림을 걸어 두기도 하였다.

망묘루는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연못 방향의 두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향대청(香大廳)
향대청은 종묘에 사용하는 향축폐(香祝幣)등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제향(祭享)에 나갈 헌관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남북으로 긴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에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공민왕신당(恭愍王神堂)    

고려 제31대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정식 이름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 이다.

조선 왕조 최고의 사당인 종묘에 고려의 왕을 모셨다는 점이 특이하다.

역성 혁명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로 해석하기도 하고,

종묘를 창건할 때 공민왕의 영정이 바람에 실려 종묘경내로 떨어졌는데 조정에서 회의 끝에

그 영정을 봉안 키로 하여 공민왕 신당이 건립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상상외로 많은 외국인들이 종묘를 둘러보며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는... 




왕의 장례식    

국장이라 하는 왕의 장례는 국가사업에 비견할 정도로 막대한 비용과 인력으로 치러졌다.

승하한 왕과 왕비에게는 흰 비단 옷으로 만든 수의를 9겹 입혔다.

소렴(2~3일 내에 하는 염습의 처음 절차)에는 겹옷, 겹이불로 19겹을 입히고,

대렴(5일 후에 시신에 옷을 입히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절차)에는 무려 90겹의 수의를 입혔다.

왕의 승하 후에는 도성의 성문과 대궐을 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5일간 장이 열리지 못하며, 3개월까지 혼인과 동물의 도살이 금지된다.

국장 때까지 시신이 썩으면 안되기에 동빙고에 저장해둔 얼음을 이용하여

일종의 냉동 안실을 만들어 놓고 5개월의 긴 장례기간 동안 시신을 보관하였다.




2. 재궁(齋宮) 일원

제를 위해 심신을 정결히 하던 곳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어재실, 세자재실, 어목욕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재궁일원 파노라마




3. 정전(正殿) 일원

역대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곳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후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곳에 있다.

남문은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으로는 제례때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으로는 악공, 춤을 추는 일무원, 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중인 왕의 4대 조상,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정전은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옆으로 증축하여 늘렸다.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 가운데에는 신문에서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있다. 제관과 집례관들은 월대에 도열하여 제례를 행한다.

신실의 양쪽에는 창고와 부속실들을 마련했다. 거친 월대 바닥과 위로 육중한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모습은 숭고하고 고전적인 건축미의 극치를 이룬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 봉안 신위    

현재 정전에는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 다음 칸부터 차례로 태종(3대), 세종(4대), 세조(7대), 성종(9대), 중종(11대),

선조(14대), 인조(16대), 효종(17대), 현종(18대), 숙종(19대), 영조(21대), 정조(22대), 순조(23대), 문조(익종, 추존), 헌종(24대),

철종(25대), 고종(26대), 순종(27 대)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49위의 신주가 19감실에 모셔져 있다





정전 파노라마



공신당ㆍ칠사당ㆍ악공청    

정전의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이 있고, 서쪽에는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공신당은 정전에 모신 역대 왕들의 공신들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창건할 때는 5칸에 불과하으나 정전에 모시는 왕의 신주 가 늘어남에 따라 배향 공신들의 위패도 늘어나 지금과 같이 83위를 모신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칠사당은 토속 신앙과 유교 사상이 합쳐진 사당이다.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봄·여름·가을 ·겨울의 운행과 관계되는 신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정전 서남쪽 담장 밖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樂工廳)이 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4. 영년전(永寧殿) 일원

왕실 신주를 모신 별묘

1421년(세종 3)에 정종의 신주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다른 곳에 옮겨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다.

그 이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녕전은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에서 조묘(䜼廟)라고도 한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 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근감 있게 지어졌다.

정전 일원과 마찬가지로 이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ㆍ남ㆍ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비를 모신 곳으로 다른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좌우의 협실 각각 6칸에는 정전에서 옮겨 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녕전은 정전과 같이 세면을 벽으로 감쌌으며, 내부 공간은 트여 있으나 가운데 4칸과 좌우 협실 사이는 벽을 두어 구분하였다.




영녕전 신위    

영녕전에는 중앙의 각 신실에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왕비들의 신주를 모셨으며,

서협실(西夾室)에는 정종(2대), 문종(5대), 단종(6대), 덕종(추존), 예종(8대), 인종(12대), 동협실(東夾室)에는 명종(13대), 원종(추존), 경종(20대), 진종(추존),

장조(추존), 왕과 각 왕의 비(妃)를 합쳐 모두 34위 신주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영년전 파노라마




5. 전사청(典祀廳) 일원

제례용 음식을 조리하던 곳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들을 보관하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 자 모양으로 건물이 들어섰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이 남아 있다.

1395년(태조 4년)에 종묘를 지을 때 함께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8년에 재건했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守僕 房)은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던 곳이며, 그 앞에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전사청 동쪽에는 제사에 쓰는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제정 주위에는 담을 쌓아 사람들이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전사청 일원 파노라마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    

찬막단은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단이다.

종묘제례에는 날음식을 올렸으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했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둘러 청결하게 하였다.

성생위는 제물(祭物)인 소ㆍ양ㆍ 돼지를 검사하는 곳으로, 제물로 올려도 좋다는 판정이 난 후에야 잡아서 썼다.

종묘 제사에는 왼쪽 표(어깨 뒤 넓적다리 앞 살)에서 오른쪽 우(어깻죽지 앞 살) 로 관통한 상살(上殺)만 올릴 수 있었다.


유교 세계관을 반한 시설물들

종묘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치들이 숨어 있다.

외대문에서 곧게 뻗어 있는 길에는 거친 돌을 깔았다. 왜그랬을까?

그 이유는 왕을 포함해서 제사 에 참여한 제관들이 경박하게 빨리 걸어가면 안되기 때문이다.

일부러 거친 돌을 깔아 몸가짐을 조심하게 한 것이다.

정전과 영녕전의 지붕 용마루, 처마, 기단, 담의 높이를 유심히 보면 모두 다르다.

지붕과 기단의 높이는 신실 - 협실 - 월랑 순으로 낮아지고 기둥의 굵기와 높이도 같은 순서로 가늘어지고 낮아진다.

이러한 건축 형식은 위계질서를 중요시하는 유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도심의 한가운데 종묘의 숲속에 에서 만난 청설모 한마리... 귀엽다.





종묘에서 바라보이는 서울의 명물 남산타워

파란 하늘과

도심속의 나무와 어우러져 이채롭게 보인다.




조선 왕실의 사당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왕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에 반드시 국가의 도읍지에 세워야 했고, 그 위치나 형식 등도 따로 규정한 제도에 의거해 정해야 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 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 단을 두어야 한다’는 주례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종묘는 임진왜란 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이다.

건립 후 모시는 신주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주를 모셨다.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지만, 왕위에서 쫓겨났다가 숙종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 영녕전, 공신당, 칠사당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 향대청, 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절제하여 단조로워 보이지만, 이는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위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 으로 등재되었다.


내용출처 : 관광가이드 소책자(종묘매표소 구입 : 500원)



서울에 살며 느끼지 못했던

종로3가 종묘를 둘러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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